중동의 ‘석유 패권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천연가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부터 해외 액화천연가스(LNG) 관련 사업에 투자를 늘리는 등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판이 커진 ‘글로벌 LNG 쟁탈전’에 뛰어들고 있다. ‘탈탄소 이행기’의 장기화로 전환 연료(bridge fuel)인 천연가스가 각광받는 것에 반해 석유의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글로벌 LNG 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도 LNG 확보에 나섰다. 사진은 지난해 6월 22일 프랑스 남부 포쉬르메르의 카바우 LNG 터미널 하역 부두에서 작업자가 LNG 수송선을 바라보는 모습. AFP=연합뉴스

이미 유럽과 아시아 주요국들이 LNG 확보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막강한 ‘오일 머니’를 배경으로 한 사우디까지 가세하면 수급 불안정성을 더 키울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발전의 30% 가까이를 LNG에 의존하는 한국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다.

호주·미국 LNG로 보폭 넓혀

사우디는 지난해 9월 처음으로 LNG에 대한 해외 투자를 단행했다.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인 아람코가 미국계 신생 LNG 업체인 미드오션 에너지의 지분 일부를 5억 달러(약 6876억원)에 사들였다. 계약 내용엔 향후 지분과 권리를 늘릴 수 있는 옵션도 포함됐다.

미드오션은 LNG 수출 대국인 호주에서 고르곤 등 3개 LNG 프로젝트의 지분을 확보한 업체다. 지난달 22일엔 한국의 SK어스온(SK이노베이션의 자원개발 자회사)이 14년간 운영하던 페루 LNG의 지분 20%를 매입하는 등 사업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

김주원 기자

올해 들어 사우디는 미국 LNG에 대한 직접 투자 구상을 밝히는 등 보폭을 한층 넓히고 있다. 미국이 지난해 세계 최대 LNG 수출국에 오를 만큼 천연가스 생산 능력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어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단 판단에서다. 아람코에 따르면 현재 미국 텍사스의 포트 아서 LNG 프로젝트 등에 대한 투자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이와 관련, 아민 나세르 아람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월 실적 발표 때 “우리는 확실히 LNG에 관심이 있다”며 “현재 미국에서 기회를 찾고 있으며, (투자 시 기대하는) LNG 용량과 관련해 여러 기관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국외 LNG를 제3국에 판매 

사우디는 미국·러시아와 함께 하루 1000만 배럴 이상의 생산 능력을 갖춘 중동 최대 산유국이다. 이런 석유 패권을 이용해 국제정치와 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천연가스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현재 사우디 내에서 생산하는 가스는 전량 사우디 국내에서 소비된다. 천연가스를 액화해 수출할 시설 같은 인프라도 전무하다. LNG 관련 기술과 노하우도 없다 보니 “개발에 나서더라도 당장은 경제성을 담보하기가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아람코 측도 “LNG 확장은 당분간 해외에서만 이뤄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해외 투자로 얻은 국외 LNG를 제3국에 판매해 수익을 내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징검다리 연료’ 천연가스 각광

사우디가 LNG 투자를 늘리는 건 화석연료의 주류가 석유에서 천연가스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아람코 역시 “석유는 LNG보다 경쟁력이 없다”고 시인할 정도다.

화석연료 중 탄소배출량이 가장 적은 천연가스는 지구온난화와 대기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 연료’로 여겨진다. 지난해 12월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제28차 당사국총회(COP)에서도 “에너지안보를 보장하고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전환 연료)”로 평가받았다.

김주원 기자

그런데 일부 서방 국가를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탈탄소화 이행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천연가스 수요가 예상보다 더 빠르고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다. ‘2050년 넷제로(Net-Zero·탄소 중립)’ 시나리오에 기반해 2030년까지 글로벌 LNG 수요가 20% 정도 줄어들 것이란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예상이 빗나가고 있단 얘기다. 오히려 업계에선 “2040년까지 LNG 수요가 50% 이상 늘어날 것”(로열더치셸, 지난 2월 발표)이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동 주도권 흔들리는 사우디 

이처럼 화석연료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천연가스로 쏠리면서 사우디의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낮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중동 내 역학 관계에서도 변화가 포착된다. 중동산 LNG의 최강자인 카타르의 존재감이 계속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카타르의 지난해 세계 LNG 수출 비중은 19%로 미국(22%), 호주(20%)와 ‘빅 3’를 형성하고 있다. 지난 2월엔 연간 1600만t의 신규 LNG 증산 계획도 밝혔다. 이는 지난해 한국이 수입한 LNG 물량(4415만t)의 약 36% 수준에 달한다.

카타르는 중동에서 가장 많은 LNG를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미 외교가에선 “카타르가 과거 사우디의 위상을 넘볼 만큼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와 관련,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하(카타르 수도)엔 LNG를 원하는 기업 관계자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을 중재하려는 외교 관계자들로 넘쳐난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사우디 입장에선 경쟁국인 UAE의 움직임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UAE의 경우 서부 루와이스에서 늦어도 2030년 가동을 목표로 신규 LNG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해당 프로젝트엔 일본 미쓰이물산(10% 지분)과 유럽의 석유 메이저인 셸·BP·토탈에너지 등이 출자할 예정이다.

“세계 3위 수입국 한국에도 영향”

사우디의 절치부심에 기존 LNG 수입국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코너에 몰린 사우디가 해외 LNG 투자로 눈을 돌리면서 LNG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로 유탄이 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각국이 러시아산 파이프라인가스(PNG)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중동 등지에서 LNG를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커진 수급 불균형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에서다.

이와 관련, 업계에선 “중국·일본에 이어 세계 3위 LNG 수입국인 한국도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국내에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등 전력 수급 계획이 변곡점을 맞고 있단 점도 큰 부담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최근 LNG 투자를 늘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익명을 요구한 국책기관 연구원은 “현재 석탄·원자력·LNG가 각 30%씩 정도 발전을 책임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국제사회에 약속한 대로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려면 석탄을 대폭 감축해야만 한다”며 “원전 확대책만으론 당장의 위기를 넘기 힘들기 때문에 LNG 확보에 보다 공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주요 7개국(G7)의 경우 늦어도 2035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를 모두 폐쇄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이들 역시 현실적인 대안이 없는 만큼 당분간 천연가스 사용량을 늘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결국 LNG 확보 경쟁은 더 심화될 전망이다.

“일본, 경제성 따져 공급처 다각화”

전문가 사이에선 “일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은 미국·호주·중동 등 해외의 굵직한 LNG 개발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석유·가스의 자주개발률(수입량 대비 국내외에서 확보한 자원 비율)이 40%를 넘나들 정도다. 반면 한국의 자주개발률은 간신히 10%를 유지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일본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면서도 러시아 LNG 지분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쓰이물산 등이 투자한 러시아의 북극권 LNG 프로젝트(북극-2 LNG)가 정상 가동될 경우 일본이 수입하는 러시아산 LNG 물량(현재 총수입량의 8~9% 수준)은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책기관 연구원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에서 LNG를 들여올 경우 조달 비용 등의 측면에서 유리하다”며 “일본은 이처럼 경제성을 따지면서 공급처를 다각화해 에너지안보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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